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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시작했냐구? 그건 모르지.. 다만 옛 조상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조사하며 추측할 뿐이지..

    선사시대의 대부도

    대부도는 시청이 있는 안산에서 서쪽으로 35.8km 떨어지고 동경 126˚39' 북위 37˚18‘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대부도라 하면 주변의 선감도, 불탄도, 풍도, 육도등 5개의 유인도와 중육도, 미육도, 말육도, 변도, 잠도, 메추리섬, 터미섬, 큰터미섬, 할미섬 외지도,등 12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기도 한다. 면적은 40.34㎢ 이고 현재(2001년) 2,316가구 6,231명(남3,226, 여3,005)의 주민이 살고 있다.

    대부도의 최고봉은 섬 중앙부의 황금산이다.

    대부도가 독진으로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을 때 진산으로 여겨진 산이다. 이산을 중심으로 100m 내외의 소규모 구릉성 산지가 북서-남동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이러한 산세의방향은 탄도와 불도에서 시작하여 대부도 북서단의 구복이(96.5m)까지 연결되어 있다. 대부도의 산세는 험하지 않으나 평지의 규모가 크지 않고 대개 산지의 골짜기를 따라 소규모로 나타나거나 해안 지역의 매립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 많다.

    섬 내에는 방죽천, 분지천, 영전천 등 비교적 큰네 개의 하천이 있는데, 이파천들은 최고봉인 황금산에서 발원한다.

    대부도의 특징적인 지형은 간석지이다.

    대부도의 북쪽은 군자만 일대로 넓은 간석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 화성군 제부도에 이르는 지역에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시화지구 개발사업에 EK라 화성군 마산포에서 불도, 탄도 선감도를 거쳐 대부도까지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지도1) 대부도 홀곶 패총

    지도1) 대부도 홀곶 패총

    이와 같은 대부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또 그 것이 어떤 계통의 주민이었는지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규명된바는 없다.

    그러나 1984년과 지난 2000년 두차례 조사된 대부면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들은 이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1984년 5월26일부터 6월1일 까지 국립박물관에서 대부도와 선감도에 대한 고고학적인 지표조사를 실시 하였다. 선감도에서는 뚜렷한 선사유적이 각각 1군대의 신석기시대 패총을 발견하여 빗살무늬토기 파편 20점과 타제석기 1점을 채집하였고 대부중학교에서 흘곶 등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마제석부 1점을 확인 하였다.

    그런데 패총에서 나오는 조가비의 90% 이상이 굴껍데기라고 한다. 지난 2000년 경기도박물관에서 재조사를 실시하여 대부도와 그 남쪽 탄도에서 신석기시대 조개더미 8곳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안산시 대부남동인 홀곶에서 2군데, 중부흥과 말부흥에서 각각 1군데, 대부북동 구봉이에서 2군데, 구봉이 회쎈타 뒷산 언덕에서도 EH 한곳이 발견되었으며, 선감동 탄도에 1군데의 조개더미가 조사되었다.

    우리나라 서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는 아가리와 그아래 부분에 서로 다른 무늬를 새기는 것, 같은 무늬로 새긴 두종류가 있고 그연대는 토기의 모든 면에 무늬를 새긴 것을 전기(B.C 5000~B.C 3000), 아가리와 몸통까지만 무늬를 새긴 것을 중기 (B.C 3000~B.C 2000),아가리만 무늬를 새기거나 전혀 무늬가 없는 것을 후기 (B.C 2000~B.C 1000)로 나눈다.

    대부도 흘곳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서해안 지역과 공통된 위의 2종류의 토기가 모두 나오고 있으며 몸통부분에 무늬가 없는 것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몸통 아래의 무늬가 생략된 형식으로 볼수 있다는 것을 토대로 이유적의 연대를 신석기시대 중기로 잡고 있다.

    그림1) 대부도 홀곶 패총 원경

    그림1) 대부도 홀곶 패총 원경

    그림2) 대부도 홀곶 패총 근경

    그림2) 대부도 홀곶 패총 근경

    대부도는 지금도 어업보다는 농업의 비중이 월등한 지역이다. 한편 흘곶 패총과 말부흥 패총은 공통적으로 바닷가에 가까운 구릉의 비탈을 택하여 위치하고 또한 남향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근거지가 바닷가의 강한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구릉을 뒤로하고 양지바른 남향터에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대부도에는 늦어도 신석기시대 중기에는 서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주민과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주로 굴 채취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수렵과 원시농경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대부면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를 이은 청동기, 초기철기시대에도 주민들이 계속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아직 그구체적인 흔적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시작했냐구? 그건 모르지.. 다만 옛 조상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조사하며 추측할 뿐이지..

    군현읍지 중의 대부도

    대부도만을 대상으로 하여 편찬된 읍지는 없다. 그러나 대부도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군현을 단위로 하여 단독으로 독립되어 편찬된 남양부읍지는 다음이 현존하고 있다.

    • 가. “남양부읍지”1책(3장),19세기 후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나. “남양군읍지”1책(13장), 1899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다. “남양읍지”1책(26장), 1899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단독으로 독립된 남양 읍지는 18세기 후반 고종대에 편찬된 본만 현존하고 있다. 읍지들이 16세기 이후 편찬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 지역의 단독 읍지는 시기적으로나 양적으로 늦으며, 부족한 편이다. 또한 읍지의 내용도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나 1840년대에 편찬된 “경기지”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남양부읍지”는 고종대에 편찬된 읍지로 추정된다. 내용은 “ 경기지”에 수록된 남양부읍지와 거의 동일하다. 읍지 앞에 수록된 읍지도도 “경기지”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데, 대부도 등 섬은 상대적으로 크게 과장되어 있다.

    그림1) 남양부읍지의 읍지도 중의 대부도

    그림1) 『남양부읍지』의 읍지도 중의 대부도

    (그림 1)(그림 2)는 1899(광무 3)년에 전국 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읍지이다. “남양읍지”는 역대 수령의 명단을 자세히 수록하여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기존 읍지에 포함된 읍지도와 비교하면, 두읍지에 수록된 지도에는 이전 지도에 없었던 면이름이 추가 되어 있다.

    “남양군읍지”의 읍지도에는 또 남양부내의 관아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대부도에는 이전에 “대금산”으로 기록되었던 중심 산이 “황금산”으로 기록 되었으며, 이전에 진이 설치되었었음을 알려 주고 “전진아사”라는 기록이 있다.

    그림2) 남양군읍지의 읍지도 중의 대부도

    그림2) 『남양군읍지』의 읍지도 중의 대부도

    대부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시작했냐구? 그건 모르지.. 다만 옛 조상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조사하며 추측할 뿐이지..

    일제시대 기록 번역문

    이 섬은 이씨조선으로부터 수백년 전까지지는 남양군의 딸린 곳으로 감목관을 설치하여 말의 사육을 주로 하던것인데 시세에 따라 그것이 폐지되고 을유년 그러니까 지금으로 1백여년전 도군으로 분리, 우영고나 겸 대부청사로 임명되어 일반 행정을 펴 왔다.

    그후 10년 후인 갑오년에는 혜지되고 남양군에 속해 있다가 해방영절제 어문을 설립하여 군무에 종사 하기로 했다. 갑진년에는 영흥면으로 분리되어 지금은 떨어져 있는 몇몇 섬들고 본도로서 동, 남, 북, 선감도, 풍도 등 5개리로 구분되어 1914년 3월 1일 부군폐합 당시 남양군에서 부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 위치

    부천군의 남단 이르자면 인청항으로부터 약 18해리 남쪽에 위치한 도서이다.


    (2) 기후

    이섬은 연중 혹한에 영하 2.3도이고 여름철에는 최고 90의 습도를 지니며 바람은 늘 부는데 대개는 서남풍이다.


    (3)인구 및 호수

    인구 및 호수
    인구 호수
    4867인
    (男 2,502. 女2,635)
    847

    부천군의 남단 이르자면 인청항으로부터 약 18해리 남쪽에 위치한 도서이다.


    (4) 경지 면적 및 지질

    경지 면적 및 지질
    경지 면적 지질
    a) 전 : 298정 1반 b) 답 : 629정 5반, c) 대지 : 36정 d) 임야 : 2543정 밭과 임야는 빨간점토 논은 청점토

    (5) 교통기관

    이섬의 동쪽부터 약 3해리의 이곳인 수원군 송산면 마산포에서 작은 배를 이용하였고, 북쪽에서는 약 18해리의 인천으로 발동기선 편이 있을 뿐이다.


    (6) 면사무소 건축의 이유

    본면사무소는 1914년 민간인으로부터 기부를 받은 이래 약 20년을 경과했으나 건물은 허물어질 우려가 있고 협소했으며 날로 팽창하느 사무를 집행할 수 밖에없었다. 1927 이후 신축을 계획했으나 재정이 궁핍해서 건축비를 지변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 독지가가 나타나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1. 공사현황
      본 건물의 설계를 바탕으로 상급관청의 허가를 얻어 1933년 12월24일 독지가 홍성균씨가 총공사비 4천9백78원을 희사하여 건축계약을 체결하고 같은해 12월 28일 기공, 이듬해인 1934년 준공을 하기에 이르렀다.
    2. 건물구조 및 건평
      - 구조는 목조 개와의 평가건
    건물구조 및 건평
    사무실 현 관 회의실 복 도 숙직실 욕 실 사환실 창 고 변소,기타
    13평 93 1평 77 10평 62 3평 63 2평 38 1평 77 1평 77 1평 77 2평 15 42평 25
    대부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시작했냐구? 그건 모르지.. 다만 옛 조상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조사하며 추측할 뿐이지..

    대부도의 3.1독립운동

    대부도의 3·1 운동 기념비

    대부도의 3·1 운동 기념비

    대부면은 현재 안산시 대부동이다. 대부면의 김윤규ㆍ노병상ㆍ홍원표 등 3인은 1919년 3월13일 대부면 영전리에서 만나 독립만세를 부를것을 결의하고 이날 밤 11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다음날 오전 3시경 집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곳 주민들이 합세하여 권도일의 집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후 위의 3인은 체포 되어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 김윤규ㆍ노병상ㆍ홍원표 판결

    • 본적지 : 경기도 수원군 은덕면 신남리
    • 현주소 : 동도 부천군 대부면 동리 1726번지, 농업(무종교)김윤규, 12월 16일생 26세
    • 본적지 : 동도 동군 동면 동리 943번지
    • 현주소 : 위와 같은곳 농업(무종교)노병상, 11월 4일생 29세
    • 본적시 : 동도 동군 동리 136번지
    • 현주소 : 위와 같은곳. 농업(무종교) 홍원표,9월29일생 45세

    상기자에 대한 보안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하여 조선총독부 검사 천명영륙 관여로 심리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 3인을 각각 징역 10월에 처한다. 압수 물건은 몰수한다.

    이유

    피고들은 대정 8년 3월 초순 이후 조선 각지에서 조선독립 시위운동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전하여 듣고 있던 차 동월 31일 때마침 피고들이 거주하는 면의 영전리 사격장에서 만나 함께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피고들이 사는 동리에서도 역시 이 운동을 하기로 결의 하여 이날 밤 오후 11시경 전기한 피고 김윤규 집에 모여 동 피고 소유의 포목으로 구한 국기 1류(증 제 1호)를 만들었으며, 이튼날 4월1일 오전 3시경같이 집 밖에 나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이 때문에 집합한 이미 10수명과 함께 그곳의 주막 권도일집 앞에서 위의 구 한국 국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부름으로써 정치에 관아혀 불온한 언동을 하므로 말미암하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

    위의사실은

    • 당 공판정에서 피고 김윤규가 판시함과 동일한 취지로 자백한것,
    • 검사의 피고 노병상 신문조서 중, 스스로 판시함과 동일한 취지로 공술한 것,
    • 검사의 피고 홍원표 신문조서 중, 스스로 판시함과 동일한 취지로 공술한 것,
    • 압수한 구 한국기의 현존하는 것 등을 종합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에 비추건대 본건을 범죄 후위 법령으로 형이 변경되었으므로 형법 제6조 제8조 ㆍ제10조에 따라 신ㆍ구 양법을 비교 대조하면 신법에서는 대정 8년 4월 15일 제령 제 7호 제1조에 해당하고 구법에서는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구법의 형이 경하므로 위 구법의 각법조를 적용하여 소정형 중 징역형을 선택, 그형기 범위 내에서 각각 처단할 것이며, 압수 물건은 범죄에 공용한 피고들의 소유에 속하는 것이므로 형법 제19조에 이거 몰수한 것으로 여겨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년5월8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금천광길


    비고

    ① 피고 3인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 대정 8년6월20일 기각되고(대정 8년 형공 제466호),

    고등법원에 상고 재정 8월11일 기각됨(대정 8년 형상 제543호)

    홍원표선생 사진과 훈장

    홍원표선생 사진과 훈장

    홍원표선생 묘

    홍원표선생 묘

    대부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시작했냐구? 그건 모르지.. 다만 옛 조상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조사하며 추측할 뿐이지..

    대부도의 전설과 옛노래

    1) 정수암

    대부 관내에 절이 세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하나 남았는데 쌍계사이다.

    이 절은 약3백 년 전인 서기 1689년(숙종 15년)에 세워졌는데 이절의 원래의 이름은 정수함으로 규모가 매우 작은 암자였다. 이절을 세운 재미있느 사연이 전해진다.

    옛날 어느 스님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현몽하기를 어느 우물에서 용 다섯 마리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것이었다. 잠을깨고 보니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다. 스님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꿈에서 본 장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큰 물위에 산이 있고 그 산중에는 우물이 있었다.

    이때 스님은 생각하기를 “이는 필경 부처님께서 나로 하여금 중생을 계도할 도량을 만들라는 계시야” 하고 그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는 죽장지난 이곳 저것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그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스님은 배를 타고 대부도에 이르러 황금산 기슭을 헤매다가 비로소 꿈의 그 자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이곳이 부처님께서 계시하신 곳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이곳에 절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건립기금 조성에 나섰다. 그는 대부도 전역을 수회하며 공양미를 거두고 독지가의 찬조를 얻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섬 주민들은 불도에 뜻이 없고 빈곤한 관계로 모금하는 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스님이 뜻을 세운지 수년, 드디어 그 정성에 감동해 기금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오륙 년 후 노력한 보람이 있어 작은 암자가 마련되었다.

    이절 옆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 우물이 바로 그 스님의 꿈에 나타난 우물로 용 다섯 마리가 승천한 곳이라고 하여 용정이라 불렀으며, 용돌이 승천한 우물이 맑고 깨끗해서 정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이절 부근에 내가 둘이 있다 하여 쌍계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렀다고 전한다.


    2) 인조와 은행나무

    조선왕도 인조 초 갑자년 정월, 이괄이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을 에워싸니, 왕은이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나 남양에 이르어 배를 타고 풍도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인조임금은 이 섬에 머문 기념으로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고이 섬을 떠나 대부도를 향하였다.

    360년 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섬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며, 이 섬 사람들은 이 어수거목을 존중시하여 잘 보호하고 있다.

    대부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시작했냐구? 그건 모르지.. 다만 옛 조상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조사하며 추측할 뿐이지..

    대부도 지명유래

    대부도는 시청이 있는 안산에서 서쪽으로 약 35,8km 해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서신동, 시흥시 정왕동(오이도)과 방조제로 연결되어 있다. 동경 126˚22', 북위37˚04'에 위치하며 면적40.93㎢ 해안선 길이 61km 이고 부속 유인도로 탄도,불도 선감도, 풍도와 육도가 있다.

    2001년 6월 현재 인구는 대부도 2,316가구에 6,087명 풍도 56가구에 94명, 육도 25가구에 50명 합계 2,316세대에 6,231(남 3,226명 여3,005명)이다. 삼국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주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 소속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남양군에 속하였다. 인조때에는 방어사가 주재하였으며 1914년 3월1일 남양군에서 부천군으로 편입되었고 1973년 행정구역 개편(법률 제2597호)으로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4년 12월26일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14,434호)dmfh 안산시에 편입되었다.

    화성시 서신에서 탄도까지의 0,853km의 방조제(공사기간 1987년 10월~1988년 4월) 탄도에서 불도까지의 0.290km의 방조제(공사기간 1988년 2월~1988년 2월) 선감도에서 대부도로 연결되는 0.327km의 방조제(공사기간 1988년 5월~1988년 5월)가 완공되었고 시흥시 오이도와 대부도를 연결하는 11.206km 방조제(공사기간 1988년 4월 ~1994년 1월)의 준공으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시화호가 생겨났다. 남양쪽에서 대부도를 바라보면 섬같지 않고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하여 대부도라고 불렀으며 다음과 같은 전래지명이 있다.

    연화부수지

    섬의 형태가 마치 연꽂이 물위에 떠 있는 것 같다고하여 부르는 명칭으로 명당을 뜻하는 것으로 인재가 많이 배출될 형상이라 한다.

    낙지섬

    섬의 형태가 큰 낙지가 팔방으로 발을 벌리고 있는 것과 같다고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황금산이 낙지의 머리이고 낮은 산줄기들은 낙지의 발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죽호

    호수처럼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대부도는 서해 훈풍의 영향과 토질이 비옥하여 대나무가 잘 자란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마을지명유래

    1) 상동 -북1,5-

    북1리와 북5리 일대를 상동이라고 부르며 옛날에 이곳에 판서가 살았다 하여 으뜸 마을이라 상동이라 했다고 한다. 또는 남양부사 절도사 등이 주재해다고 해서 상동이라 부른다.

    - 말물재 :

    동사무소 뒷산의 명칭이다. 산의 형태가 말의 모양 같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서쪽의 범둣재 앞쪽이 말의 꼬리,산중간지점이 말의 배 예비군중대 뒤쪽이 말의 목, 갈마지쪽이 말의 머리라고 하는데 갈마지는 옛날에 물이 흔했으나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셔버린 것 같이 물이 귀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 독족골 약수터 :

    범둣재와 말물재산 사이 북쪽으로 있는 골짜기로 수량이 많은 우물이 있다. 말물재산 꼬리에 해당돼 말의 오줌같다하여 약수로 알려져 있으며, 손 발이 삐었을 때 담그고 있으면 낫는다고 한다. 범둣재 당고사 ?물보 목욕재계하였다고 한다.

    - 범둣재 :

    대부초등학교 뒷산으로 범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다. 이산은 와골에서 시작하여 범둣재에서 그쳤는데 와골쪽이 범의 꼬리이고 범둣재이 범의 입이 상동쪽을 향하고 있어 옛날에는 상동쪽에서는 소를 키우기 힘들었다는 말을 있다.

    - 일제의 신사터 :

    동사무소 뒤의 예비군중대 자리, 일제말 신사를 지으려고 터를 닦았으나 팽망하여 짓지 못했다.

    - 왕잣재 :

    이괄의 난 때에 인조대왕이 피난차 대부도에 잠시 머물러 동사무소 앞 논뜰 건너 등성이의 잔디밭에 앉았다 일어나 다시 피난길로 떠났는데 왕이 앉았다가 갔다고하여 왕잣재라 한다.

    - 소자마을 :

    400여년 전에 신씨가문에 효자가 있어 임금이 효자정문을 내려 효자마을이라고 했다 한다. 효자가 소자로 변음 됐으며 소자마을 신씨는 영월 신씨라고 하며, 한편 남양읍지에 평산신씨 신용남이 목자로서 효행이 깊어 효종때에 효자정문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으나 대부 초등학교 옛 정문 앞 신응구라는 사람이 집 앞의 효자문을 해방 후까지 관리했으나 소실된 시기는 정확치 않다.

    - 개잡재 :

    북1리 남쪽 끝쪽에 있으며 옛날에는 이곳에서만 개를 잡았다고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수문통안 :

    북1리 서쪽 해안에 있는 논벌을 말하며 방죽을 막고 배수로를 만들었다하여 수문통안 이라고 부른다.

    - 서풍산 :

    북5리 서쪽 해안에 있는 논벌을 말하며 방죽을 막고 배수로를 만들었다하여 수문통안 이라고 부른다.

    - 서풍산 :

    북5리 서쪽 해안에 남북으로 가로 막힌 산줄기로 서풍을 막아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상지목골 :

    범둣재 넘어 대부중학교 못미쳐 있는 마을로 옛날 대부진주위에 토성을 쌓았던 아래의 골짜기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장승백이 :

    와골 못미쳐 있는 마을로 장승을 세웠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감남골 :

    북1리 서쪽마을로 옛날부터 감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벗말 :

    대부출장소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갯벌이 있어 염벗을 민들어 소금을 굽던 곳에 생긴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서편말 :

    동사무소 서쪽 마을로 소자마을을 말한다.

    - 너분섬 :

    물이 빠지면 연육이 되는 섬으로 봉우리 남쪽이 넓고 평평하게 되어 있다.(옹진군 선재도에 소속된 무인도이다.)

    - 병풍산 :

    바다에 서 있는 바위산으로 병풍처럼 생겼고 물이 빠지면 연육이된다.

    - 두루섬 :

    병풍산과 너분섬 중간에 있는데 너분섬 양쪽으로 뱃길이 있어 뱃사람들이 두루 살펴보고 다니는 섬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 흰바구리 :

    산이 온통 하얗기 때문에 부르는 이름으로 새방죽 옆으로 있는 작은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