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호는 시흥과 화성에서 한 글자식을 따서 지은 지금의 호수 이름이다.
하지만 시화방조제가 생기기 전의 애초 이름은 군자만이었다.
사람들이 사화호를 군자만이라고 부르던 시절, 군자만의 품 안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생명과 그 생명이 살면서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와글거리고 있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사리포구며 마산포구, 대부도, 어도, 형도, 우음도 인근의 포구와 섬들과 갯벌엔 갖가지 바다 생물이 넘쳐나고 그걸 잡아서 팔고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물자와 사람이 넘쳐났다는 건 그만큼 돈도 흥청거렸다는 얘기다.
사람의 살림에 관계된 이런 것 말고도 흥청대던 것은 또 있다.
갯벌에 먹이 찾아 날아오는 그 많은 새들의 날개짓, 갯바람에 살랑대던 온갖 종류의 풀과 꽃들.
그 그지없이 아름답고 예쁜 생명들도 득시글거렸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서 드넓은 갯벌로도 유명했고, 밀물 때면 수심이 깊어 우리나라의 저 남쪽에서 나는 갖가지 물자를 제물포나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뱃길 물자 수송의 중요한 길목 노릇도 했다.
옛날에 마산포 물길은 썰물 때도 배가 지나다닐 만큼 물골이 깊은 곳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 바다에는 고깃배도 있었지만 목재 같은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선이 많이 다녔다.
군자만의 먼 고대 때를 생각하면 한순간 아득해진다.
그 긴 세월 동안 군자만의 품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자연 그대로의 질서 속에서 살고 죽어갔을 거를 생각하면 말이다.
바닷물이 빠진 뒤, 최근에 발견되어 많은 이들이 연구나 견학을 오는 공룡알 화석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군자만 일대에는 공룡도 살고 갖가지 새들, 풀과 나무와 꽃들, 생태계의 질서 유지에 큰 이로움을 주는 온갖 미생물들, 또 먼 북방에서 삶의 새 터전을 찾아 이주해온 한반도의 인류가 다 깃들어 산 것이다.
그런 삶의 흔적들이 지금의 시화호 땅 곳곳에서 발견되는 석기, 토기, 규화목, 고인돌 같은 생활 유적들이다.
『시화호 사람들, 그 100인의 꿈』에서 발췌